나이든 사람과 말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생각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다 창밖을 보며 먹는데, 재활용품을 수거해가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연히 나이든 어르신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순간 낯선 이의 얼굴을 보는 나의 반응이 너무 이상했다. 두텁고 거무튀튀한 피부,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숱한 주름들, 어딘지 힘이 풀린 듯한 벌어진 입 같은 것들은 단지 그 사람이 노인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지만, 그것을 보는 나의 기분은 단순히 낯설다는 것을 떠나서 마치 전혀 다른 인종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내 나이가 올해 이십 대 중반이다. 비교적 늦둥이로 태어나 양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어려서 여의고, 줄곧 그 나이대의 어른들을 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건 제대하고 회사에 다니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우리 회사의 사람이나 회사의 고객들이나 하나같이 많아야 40대 전이고, 공부를 하건 놀러 가건 하나같이 또래들이 모이는 곳에만 모인다. 이러니 나이든 어르신들과 말을 섞을 일이 없다. 그래도 생각해 보니 한때는 서예를 배울 때나 한학을 전문적으로 배우고자 하여 OO에 다녔을 때 제법 많은 어른들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노인분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딱히 내가 말을 걸어보기도 민망하거나 예의에 어긋나고, 통하는 주제도 없어, 물어오는 말에 짧게짧게 대답하다 보면 대화라기 보단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워진다. 그리곤 회사일로 번번히 그만두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노인의 말이라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때 시위장소를 지나치며 '하여간 절라도 놈들은 다 내려보내야돼'하던 지껄임 뿐인데, 덕분에 노인에 대한 나의 편견은 무척이나 심해져 있다. 그러나 나도 곧 노인이 되고 말 것이다.

요 몇달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도 바쁘게 지내고 나니, 삶의 본보기가 될 만한 어른이 실로 절실해진다. 나는 평소 '종일 도덕에 뜻을 두었어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였던 이고나, 유명한 연암이나 다산 같은 숱한 유학자, 또 함석헌과 같은 사상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백 세 전의 사람에게나 흉금을 터놓고, 만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던 초정의 글처럼 책 밖에서는 존경하고 따를 어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의기는 충만하지만 융통성을 잘 몰라서, 이처럼 독학이 계속되고 선학으로부터 실용적인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종국에는 고루해지거나 천박해져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 두렵다. 주위에는 훌륭한 또래들이 많지만, 열정적인 무리 가운데서는 다만 박학다식함을 경쟁하게 될 뿐이고, 나와서는 외모, 패션이나 기기들 같은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것들에나 신경을 쓰게 된다. 어른들 가운데는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나의 편견을 형성한 사람들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덧. 본래 이 글을 쓴 것은 이처럼 오랫동안 젊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아도 될 정도로 사회가 이분화되어있다는 점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인데, 중간에 개인적인 아쉬움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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