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품이란 나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생각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책 전반에는 잡스의 별난 성격과 성장 배경 등 IT 호사가라면 좋아라 할 여러가지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데, 특히 맥, 아이팟, 아이폰과 같은 뛰어난 제품들의 탄생 배경도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첫 번째 매킨토시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으로, 잡스의 디자인에 대한 철학, 사용성에 대한 관점, 팀원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방식이 빠짐없이 나타나 있다. 내가 이 부분을 주의깊게 읽었던 것은 아마도 최근에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겪고 있는 심각한 의욕 부진으로 여러 가지 고민이 쌓인 까닭이리라.

현재 내가 근무하는 곳은 기업에 납품되는 솔루션을 제작하는 업체인데, 백날 하청을 받아 고객의 요구대로 만들어주던 웹 에이전시 생활에 비하면야 내(회사의) 제품을 만드는 일이므로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욕이 떨어지는 것은 첫째 애당초 내가 기획하고 설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둘째 제품 자체의 쓰임이 내 관심사가 아니고, 셋째 여전히 고객의 의견이 (회사 입장이 아닌 제품 관점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반영되는 까닭이다. 이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제품이 최종 사용자 대상이 아닌 기업 대상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매킨토시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보자. 여기서 잡스는 - 오만과 독선, 괴짜에 대한 이야기들을 무시하자면 - 구현해야 할 목표를 설정하는 '감독'의 역할을 한다('감독 대 위원회:애플과 구글'에서 이 비유는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감독이 가장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은 목표로서 완성된 제품의 명쾌한 그림 혹은 그것이 충족시켜야 할 시장이 아니라 구현되어야 할 가치들이라는 데서 다른 감독들과 구분된다. 서로 다른 기술과 관심사를 가졌던 팀원들은 이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아이디어를 보태 제품을 만들어나간다. 감독은 자신의 가치를 팀원 모두가 자신의 가치로 생각할 수 있게끔 독려한다. 이렇게 완성된 제품을 팀원들이 온전히 자신의 예술품으로 느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동의하는 가치가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단지 자신의 사인이 들어갔다거나 강요된 장인정신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리라 여겨진다.

사실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은 상당히 다양하다. 그중 내가 가장 많이 취해왔던 방법은 기술 자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방법이었는데, 이 방법은 내 타고난 천성으로 인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반면, 그 기술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현재와 같이 제품을 만드는 상황에서라면, 내가 관심을 쏟는 기술은 단지 도구나 부속품으로서 제품의 극히 일부분이거나 심지어 제외될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한계가 분명하다 하겠다. 한편 다른 방법으론 금전적 이득을 생각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과 재물을 추구하는 일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이분법적 삶은 나의 DNA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일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고, 그럼에도 모든 기술에 흥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까닭에 일의 방법(기술)에서 흥미를 얻을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라곤 일 그 자체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일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까? 팀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일이니 회사니 하는 것들을 떠나 내가 나날이 나의 가치를 실현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통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자기 세뇌로 해결할 부분이 아니다. 요컨대 내가 회사의 목표에 동의한 만큼 나도 나의 가치를 목표에 충분히 투영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안 되어 끝내 남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된다면 설령 기획과 설계를 모조리 내가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내 나의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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