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공간 안에서 답답한 현실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불가능한걸까. 사실 현실 세계라고 단정지어지는 추상적인 거대한 존재와 살갗 안의 용서받기 힘든 존재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벌어져 있어서, 의외로 그것은 상당히 격리된 채로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TV가 켜지고 부엌 싱크대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오며 창밖으로부터 집 근처 대형 가전제품 매장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란스러운 음악과 내가 교화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있는 듯한 두사람.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편히 견뎌내기 위해 험담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 둘러쌓여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 상황이 사실 좀 의심스럽다. 어디, 산뜻한 초원의 바람이라도 맞으며 느긋하게 써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곳에서는 풀숲의 작은 흔들림에조차 마음을 빼앗겨버리기 마련이다. 아무도 그런 곳에서 문명의 이기들, 이를테면 펜과 종이, 나같은 경우에는 노트북이나 휴대폰, 이런 것들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누군가 그런 곳에서까지 '그런 짓'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분명히 맑은 공기를 마시러 올라간 산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건 우스운 행위이다. 사실은 어떤 이유로 그런 곳에 갔느냐에 달려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나의 인내심, 정확히는 나의 몸이 전달하는 모든 불쾌감, 소음, 답답한 공기, 불편한 자세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어지러운 광경들이 뇌에 전달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동안 어떻게 효과적으로 차단하거나 무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를 위해 지금 나는 오피스텔 전체에 하나뿐인 작은 문에 기대어 있고, 그를 위해 전체가 유리로 채워진 벽에 바짝 붙어 설치된 선반 위에 올라가 앉아 있다. 그리고 나의 애마 -15인치의 대형 노트북-을 편히 사용하기 위해 식사시간을 위해 쓰여지던 작은 사각 탁자도 가지고 올라왔다. 사실 선반은 사람이 상까지 펼치고 ㅤㅇㅏㅈ기에는 매우 좁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노트북이 떨어져 버릴 수 있다. 그것은 조심해야 한다, 비싸기 때문에, 내 몸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용적이다, 따라서 매우 타인에게 관대하고 이타적일 수 있다,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에 대해 관대하므로, 이런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혼란스럽다. 그것은 아마 TV에서 나오는 소음과 집 안팎에서 나오는 모든 소음을 무마시키기 위에 내 귀에 꽂아지 이어폰에서 시끄러운 음악이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단지 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일본 곡을 선택해서 무한히 반복하도록 했다. 그것은 최신형 MP3 휴대폰의 기능 중 하나로, 지난 2월쯤 샀기 때문에 어쩌면 최신이라 하기 어려울 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녀석은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해 주고는 있으나, 그 좋아하는 일본 곡 자체에 집중하게 되어 버려 정작 모니터를 제대로 보고 생각할수가 없다. 모니터를 보고 생각하려 드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 종이를 펼친 화가처럼, 아니면 가만히 생각이 떠오를 때 까지 기다렸다가 모니터를 펼치는 것이 나을까, 역시 이 모니터는 너무 어두워, 다른 기종을 살 걸, 지금 팔기엔 너무 늦어 버렸어,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줄이면 더 곤란해져, 디지털 음원은 사람의 귀에 치명적이라던데, 뇌도 피곤해진다고 하더군, 하긴 이어폰을 꼽고 그런 생각을 하긴 너무 사치스럽지, 하는 생각들만 떠오른다. 사람은 어디에나 적응 잘 하기 마련이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생각들을 집어치우고 오랫동안 구상하던 것을 떠올려내는 대신 되는대로 적어버리는데 손가락과 손목의 근력들을 허비해버리고 만다.
다소 뜻밖인 것은 이제 이 적어버린 생각들에 대해 누군가 '그거 참 좋은 생각인데!'라는 답변을 기다려 볼 요양으로 인터넷에 올릴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나의 변화들에 대해 성의없고 지루한 관찰들과 그 결과로 일종의 편집병으로 보이는 판단들을 내리고 만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하든/하지 않든 그것은 생소하고 놀라운 것이다. 나의 글들은 형편없다. 이것을 인정하는것도 반대로 추켜올리는 것도 내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올려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상상하는'것 또한 나의 놀라운 변화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무언가는 할 것이다. 단지 생각이 그러하달 수도 있다. 논리의 기반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 컴퓨터의 논리는 그렇지 않던가. 디지털의 논리가 인간보다 뛰어나단 말인가. 절대성을 지닌 불멸의 네트워크, 그것이 지금 뜨거운 열과 함께 괴이한 소음을 내며 내 손 아래서 돌아가고 있다. 이제 과학이 발전하면 흑색의 멍청한 네모상자를 더 이상 그렇게 부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소음과 부피, 디자인 따위를 들어 현학적으로 이것을 비웃거나 할 수 없겠군. 최소한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기계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이다. 이 기계는 수명이 짧고 과도하게 무거우며 배터리는 3시간도 가지 못하고 그 안의 소프트웨어란 온통 버그 투성이라 사용자를 분노하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절대성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최소한 소프트웨어 만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과 접촉하는 유일한 통로인 피부처럼 하드웨어들은 녹슬고 부풀고 쓸데없이 전기를 낭비하여 결국 이 혼돈의 해악은 소프트웨어까지 던져진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해악이란 말인가, 불쾌하다. 그러나 이 모든 불완전함에 대해 나는 디지털에 대한 모든 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쉽게 언급하고 마는 '아직까진'따위의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즉 이것은 분명하게도 그러하다. 네트워크는 오프라인 세계 위에 있지만 아주 동떨어진 저 우주 너머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간단한 방법은 접속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주 많은 글들이 그 세계에 투입되었고 대부분은 무시되었다. 여기서 다시, 나는 '대부분은 대단한 것들이었다'그리고 '대부분은 주목을 받았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사실이다. 사실 세 번째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가 무엇을 보았는가를 추적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 확신하지 못할 부분에 대해 다소 희망적으로 남겨두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를 보기 위하여 스크롤을 올려 글의 서두를 보고는 '아'하는 탄성을 지를 뻔 했다. 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나의 입장에선, 좋은 키보드와 모니터, 좋은 타법이란 참 대단한 것이다. 손끝에 밀려오는 유쾌한 통증을 견디며 천천히 나의 생각을 옮기고, 수정하고, 지우고 하는 작업들은 언제나 시작할 수 있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컴퓨터를 권하면 그들은 할 말이나 어떤 할 일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누구나 펜과 종이를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을 준 손에서 넘어온 모든 것을 상자에 몰아 넣고 땅에 묻은 채 평생 꺼내보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단지 가능성만을 두고 보면 그들은 그저 주목하지 않은 것 뿐이다. 나를 보라, 그저 노트북을 켰을 뿐인데 이렇게나 많은 글줄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정말 그것은 언제든 가능하다. 당신도 익숙해지면 그렇게 할 것이다. 단 먼저 타법을 좀 배워야 하는 수고가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갑자기 어느날 이 세계에서 전기가 나가 버린다면 무슨짓을 할까 생각했다. 아마 나는 일단 이 노트북을 분해해서 거기에 색을 칠할 것 같다. 어쩌면 박살 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늘 찢어져 쓰레기통으로 정확하게 던져지는 원고지와 힘없이 떨구어지는 펜, 얼굴과 몸으로 튀는 물감이나 찢겨나가는 스케치북 같은 것들을 그리워했다. 심지어 무대 위에서 철저히 박살나버리는 기타 같은 것들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감정을 잘 견디어 내는 것 같다, 아니 인간 스스로 견딜 수 있도록 해준다. 찢고 부수고 계속 해도 결국 돌아가니까. 반면에 나는 휴대폰을 던지고 노트북을 반으로 쪼갤 생각을 몇 번이나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것들은 신용카드를 통한 할부 요금 납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물건이 아닌 것이나 다름 없는 불안감은 요금을 다 낸 뒤에도, 쓸모가 없어져 팔 생각을 하면 다시 생겨난다. 흠집을 내지도 못하고 보호 케이스를 비싼 돈을 들여 붙여줘야만 하는 것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생명이나 다름없는 가치를 잃어가는 그것들. 내가 열지 않았어도 언제나 기술이 발전하는 시간 덕분에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들, 그러나 그 모든 측면에서의 한계 효용이 완전히 제로가 되었다고 해도 스스로를 계속 지탱해 나갈, 내 힘으로는 어떻게도 그 본질을 파괴할 수 없는 금속, 금속들. 나는 늘 터치스크린이 달린 태블릿을 가지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태블릿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몇번 던져서 끄떡 없는 노트북이 나오기 전까지는, 하지만 나는 그런 노트북이 나오면 매일 노트북을 던지고, 그 짓을 견딜 수 있는 노트북이 나오면 매 시간마다 던지겠지. 참 통쾌하기도 하겠다. 탓닛한의 가르침을 보건대 그런 폭력성의 조장이 결국 확장에 성공할까, 나는 생각한다.
'투쟁 영역의 확장'에 나오는 주인공은 나와 닮았다. 물론 내 방식대로 해석할 경우에, 우울증을 가지고 있고, 예측 불가능하고 -이것은 우울증의 증상일까?-... 물론 그쪽은 사회적 지위에서 볼때 나보다는 한참 위이지만. 게다가 그 작가는 전혀 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무척 희망적인 엔딩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옮긴이의 글을 보고 내가 완전히 혼동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읽혀진 이에 의한 독자의 보편적인 권리, 재창조의 권리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감히 입을 연다는 심정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내가 다시 경계에 선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는 경계로 돌아왔다. 혹은 돌아갔다. 엔딩 장면의 거대한 숲, 모든것을 빨아들이는 완전한 빛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여겨진다. 그 빛 속에 추상적인 모든 것들이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그 안의 주인공은 죽음이나 삶이 없지만, 불멸이란 그때에 존재해서는 안된다. 삶과 죽음이 없는 상태, 그 상태에서 주인공이 다시 경계에 서느냐, 장애를 넘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이런 말들을 하며 순간 나는 리뷰랍시고 말도 안되는 사족들을 덧붙이는 평론가들의 기발한 상상력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