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인 스케이프를 플레이하며 서양식 RPG를 생각하다 생각

처음에 껍질인간 님의 블로그를 보게 된 건 순전히 검색엔진에서 일어난 우연에 의해서였다. 발더스게이트가 서양식 RPG를 죽였다는 소리에 당황스런 기분으로 기사를 훑어내려가다가, 알 듯 모를듯 한 구석이 있어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댓글도 모두 읽어 보았다. 처음에는 저자의 고집에 괜한 반감도 가졌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하게도 점점 공감이 되었다. 특히 울티마4 리뷰를 보면서 나의 게임 취향과 근래 게임들에 무관심해 진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된 데에는 오히려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가장 최근에 즐긴 게임은 플레인 스케이프 토먼트와 마이트 앤 매직 6이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플레이해 본 게임들이지만 서로 다른 이유로 엔딩을 보지 못한 것이다. MM6의 경우 당시 집의 펜티엄1 머신을 RAM을 업그레이드 하면서까지 사투를 벌이며 플레이했지만 후반부의 악명높은 던전들을 탐험하다 도저히 출구를 찾지 못해 결국 접어버렸던 것인데, 결국 플레이 한달 여 만에 오라클을 만나게 되고 다시 지옥의 던전들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토먼트의 경우 이상하게 발더나 아윈데에 비해 흥미가 생기질 않아서 극초반만 진행하고는 쭉 방치해 온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최근에 맘잡고 다시 플레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게임, 중반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정이 안 간다.

불사신이 된 주인공, 그리고 다콘과 모트와의 과거와 깨달음에 관한 대화. 딱 그 정도가 인상깊게 남아있을 뿐, 다른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던전이나 전투는 아윈데를 경험해 봐서 그런지 심히 밋밋하고, 넘쳐나는 퀘스트들은 그저 의미없는 노가다(그것도 뛰어다니는 노가다)처럼만 느껴진다. 그런데 왜 그렇게 느껴지는고 하니 내가 또 재미없게 플레이하고 있다. 놓치는 대화와 선택지가 있을까봐 일찌감치 지혜 19를 찍어놓고, 대화는 나의 기분에 맞춘다기 보다 플레이어의 속성을 따라간다. 그런데 내가 연기하기로 한 속성은 '질서 선'이다. 왜 그런고 하니 바쁜 직장 생활에 플레이 기회는 많지 않고, 이런 블랙아일-바이오웨어 류의 게임에서 질서 선의 행동과 그에 맞춘 행동은 늘 최고의 보상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화 선택지는 늘 '어느 것이 지능에 따라 만들어진 더 나은 대답일까' '어느 것이 질서 선에 걸맞는 대답일까'를 고르는 싸움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명백하게 지루하다. 그러나 스토리가 격하게 칭송받는 게임이니 제대로 된 선택지를 골라 모든 이야기를 다 보아야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가 AT필드를 해제하고 혼돈 악으로 신나게 플레이해보겠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언제 그럴 기회가 생길지 까지는 사실 생각해본 바 없는 게다.

내가 서양식 RPG를 좋아한다고 말할때는 늘 자유도를 손에 꼽는데, 이렇게 되니 이 게임에는 자유가 없다. 나는 서양식 RPG에서 보여지는 자유의 일례로 마을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돌아오는 것은 불이익, 그것도 캐릭터의 시체 아니면 게임오버 화면 아니면 진행 불가능 상황이 되는 불이익들 뿐이다. 기실 그것은 퀘스트의 수단으로서 좀더 풍부한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이유라면 모를까, 단지 그 자체로는 결코 자랑할만 한 자유가 아니다. 또 대화에 선택지가 있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인피니티 엔진 게임들에서 중립적이거나 악의적인 자세를 취해서 얻는 (선역 대비) 심각한 불이익들은 마치 개발사가 보내는 차가운 경멸의 눈빛처럼 읽힌다. 마치 '넌 그런 짓이나 하면서 즐거워하는 구나.' 하며 조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이머가 캐릭터에 몰입하고 몰입한 채로 모든 행동을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것, 그것이 자유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일단 끊임없이 초기 성향 생각해야 하고 왔다갔다 하면 가차없이 불이익을 때리는 D&D는 안 되겠다. 사람이 성향이 확실한 경우도 있지만, 천하의 악인이라도 감동적인 사연을 들으면 순간 동정을 하게 된다던지 하는 경우도 있고, 애매한 경우는 더 많지 않은가. 능력치 따라서 대화 내용 제한되는 것도 안 되겠다. 행동의 결과라던지 매력에 따른 것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지능 때문에 문장을 안 보여 주는데 내가 또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것을 어쩌겠는가. 또 인피니티 엔진(그리고 오로라 엔진) 게임류의 대화방식도 곤란하겠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문이 몰입을 방해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원하는 모든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같은 대화를 반복(예를 들면 1)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2)그럼 A는 무엇이오->1)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2)그럼 B는 무엇이오 식의...) 해야 하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일단 이 두 가지만 놓고 보아도 난 플레인 스케이프와 정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스윈드 데일은 몇 안되는 대화조차도 발더나 플레인 스케이프보다 훨씬 더 몰입하면서 했다. 왜일까? 대화 지문의 세련됨이나 아까 예로 든 반복 노가다를 시키지 않는 스크립트의 빼어남 때문일까? 혹은 주인공에게 아무런 스토리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커스트를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플레인 스케이프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껍질인간 님의 블로그를 보며 문득 다시 플레이하고 싶어 지는 건 울티마 7과 모로윈드다. 특히 모로윈드는 아직도 확장팩의 엔딩을 보지 못한 상태인데, 그 이유는 내가 늑대인간과 사람 둘 중의 하나를 '영구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플레이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팩션들은 몰라도 이 두 개는 너무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토드 하워드가 듣는다면 다신 그런 선택을 주지 않겠다고 대답할까? 혹은 둘 모두를 선택할 수 있는 반지나 NPC를 제시할 지도 모를 일이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늑대인간측이 아닌 기본 퀘스트들을 다 끝내면 진짜 변신용 반지를 주긴 한다 :-p) 하지만 내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오히려 얼마나 지루하고 나아가 비참함까지 느껴지게 하는 지는, 이미 오블리비언에서 신물나게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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