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생각

김제로 향하는 무궁화호 안에서
피로가 쌓여 있었다. 열차에 올라타기 전부터 눈이 충혈되고 주위가 퀭하여 마치 술마신 팬다같더니, 자리에 앉자 마자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새로 구매한 랙기어 가방은 사소한 사이즈 문제로 자꾸 허리에 자극을 주어 (가방의 장점인 무게 분산 면에서는 대단히 비효율적이게도) 제일 아랫부분이 엉덩이까지 내려오도록 해서 매어야 했다. 요 근래 너무 자주 앉아 있기만 해서였는지 무릎 앞쪽이 슬슬 불편하더니 어젯밤 영화를 보면서는 제대로 아파버렸다. 보고 나온 직후에는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했으니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 휴식을 취할 시간에 기차를 기다렸다. 여행에 체력이 필수라는데 나는 기본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본을 어기고 있는 것으로 치자면, 내가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시작한 지 겨우 사흘 째라는 것을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뭐 프리랜서라는 게 원래 제때 일만 마치면 되니 원칙적으로 문제될 이유도 없지만, 일정이 대단히 빽빽하게(사이트 오픈이 시급하다는 고객측 이유로) 잡혀 있었던 것도 그렇고, 웬지 누군가가 내 꼬락서니를 본다면 '일을 해야지 왜 그러고 있나!'라고 할 것 처럼 찝찝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명색이 길 위의 프로그래머인걸. 타이틀은 둘째 치고 역마살이, 혹은 마음속에 가득 차올라서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같은 무언가가 자꾸만 답답하게 가슴을 조여오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간만에 무려 나흘이나 되는 휴일을 맞이한 애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것만 같은 책임감,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일, 복잡하게 쌓인 집안의 온갖 잡다한 일들보다도 나의 마음을 끌어 결국 내가 한달음에 역으로 달려오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이젠 정말 어쩔수가 없다.
지금 향하는 이 곳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당장 숙박이 문제다. 시내에 숙박 시설이 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고 전에 왔을 적에 PC방과 찜질방을 이용했던 기억이 나지만 24시간 운영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비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숙박시설이 있다고 해도 인터넷 및 냉방시설이 원활하게 될 지는 의문이다. 작업을 위해 인터넷은 필수인데 원격 데스크톱 및 FTP를 함께 써야 하기 때문에 웬만큼 빠른 속도가 나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틈에 시외의 전경을 감상할 것인가도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금요일 전까지 마쳐야 하는 일과 돌아다니기 어렵게 만드는 찌는 더위를 감안하여 잘 조율을 해내야 한다.
사실상 '길 위'를 언급하고 나서 첫 번째 여행 작업(?)이다. 부산이나 다른 곳과 달리 김제에 가야만 했던 다른 외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즐겁게 그리고 잘 마쳐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겠지. 부디 여유만만 하자.

8월 4일 오후 9시 58분

추기 -
역 건너편에 여관이 한 곳 있었는데 불이 꺼져 있었다. 숙박 시설은 터미널 주변에 모텔 2곳이 있는데, 터미널 주변은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과 PC방, 식당 등 여러 시설이 모여 있었다. 반면 한밤중에도 운영되는 목욕 시설이 없어 다음날 아침에 역 근처 3층짜리 찜질방을 들어가 보았는데, 시설이 형편없었다. 더운 날씨 속에 수면실은 완전히 밀폐된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에 불과했다. 결국 대충 몸만 씻고서 나와야 했다. 저녁은 전주에서 보내는 것이 편리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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