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2 생각

사실 이번 글은 '집에서'다.

-앞 글에서 이어서
야우리백화점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의 허브시티란 곳에서 잠을 잤다. 5층짜리 건물인데 멀리서도 간판이 크게 보인다. 가격은 목욕시 5천원, 취침겸시 7천원이고 15시간 이후로는 시간당 5백원의 추가 요금을 받는단다. 수면실은 쓸만하고 식당 헬스 만화방등 편의시설이 갖추어 져 있지만 주말 저녁의 늦은 시간에는 자칫 수면실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내가 들어간 11시에는 자리가 반쯤 남아있었으나 1시쯤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자리가 없다고 소란을 피우길래 눈을 떠 보니 주위가 온통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
잠자리에 든 시간이 비교적 이른 만큼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푸른 빛과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며 시내를 활보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막상 다음날 일어난 시간은 무려 아침 9시였다. 이제 나도 방랑객이 다 되었는가? 몇년전 처음 사우나 수면실을 이용할 때만 해도 잠드는 데 1시간, 그나마 4시간 이상 편히 잠을 못 자는게 기본이었는데 세상 모르고 잔 모양이다. 비록 흐린 날씨였지만 날이 더워지고 썬크림도 챙기질 않아 시내 도보는 포기하고 전날 피씨방에서 알아본 천안 여행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알아봐 둔 곳은 독립기념관. 그러나 그때만 해도 갈지 말지 확실히 마음을 정한 것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교통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보도 한가운데서 네이버를 검색하여 교통편이 버스 3x0~400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과연 힘이 되는 오즈?!(주 : "힘이 되는 OZ"는 요즘 오즈 광고 문구다) 하지만 이런 식의 활용은 점점 사람의 준비성을 저해하고 공중 무선 인터넷에 얽매게 만들 것 같아 자제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야우리백화점(버스터미널) 앞에서 400번을 탔다. 시내를 돌아 푸른 시골 도로를 조금 달리자 독립기념관 정류장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내려선 곳은 주차장이었고, 멀리서 사진으로 보아오던 -어렸을 적 수학여행을 온것 같긴 한데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이른바 '겨레의 탑'이 보였다. 사진만 생각하고 '탑 하나에 큰 건물 하나, 안에서 전시 좀 보면 끝나겠군'하고 들어섰는데 웬걸,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건물-'겨레의 집'은 사실 연구동과 관리동이 좌우로 자리잡은 시설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로 중앙의 식당과 7개의 전시관이 펼쳐져 있었으니 제대로 오판 한 것이었다.

거대한 시설 규모에 비해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한적했다. 과연 휴일 아침! 이런 시설은 평일 오전에 오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거나-편의시설 폐쇄나 시설 공사 등- 단체 관광객들에게 치이기 마련일테니 이른 시간 방문을 하는 게 제일 나은 것 같은데, 그것이 비교적 시원해 사람들이 많이 찾을 것만 같은 한여름의 이른 아침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기이했다. 입구를 지나니 못이 있는데 팔뚝만한 잉어며 거북이까지 새빨갛게 몰려들어 서로 뒤엉키며 수면으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길래 무언가 했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과자를 뿌려대고 있었다. 난 동물을 갖고 노는 그런 행태가 너무 싫다. 때론 무더기로 뿌리고 때론 일부러 저 멀리로 던져 헤엄치게 하면서 잉어들이 서로 뒤엉키는 꼴을 보고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에, 교감 따위의 거창한 단어가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안에서 보고 적은 메모 몇가지.
- 고조선 소개에 '우리의 첫 나라'. 내 비록 환단고기 류의 서적을 신봉하거나 하진 않지만, 치우는 말할 것도 없고 염제나 고대 은(상)나라를 우리의 연원으로 보는 학계의 연구도 있는 마당에 굳이 '첫 나라'라고 확정지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앞에 '알려진'이라는 단서를 붙이기라도 하면 모를까.
- 월인천강지곡의 한글과 한문 병행 표기. 반복되는 괄호가 가독성에 나쁘니 일부 책들이 이미 그러하듯 원문을 작은 글씨로 옆에 바로 적자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사례. 나중에 주장화할 경우 근거삼을 수 있을듯.
- 선사시대 동굴 벽화의 네모난 도형들을 티 등에 널리 활용할 수 있을듯.
- 최근의 건국절 논쟁과 관련하여 - 광무황제 당시 하사된 태극기가 존재하는데 오늘날 태극기를 휘두르고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들을 청대의 반청복명 주장자들같은 불순분자로 만드려는가?
- 독립문을 통과하며 - 우리 시대의 여러 '문'들을 주제로 역사를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 고구려와 고려의 문, 숭례·광화문 등이 떠오름.
- 독립기념관이 무료화되었던데 이거 어디서 운영? 민영화 안하겠지? (농담)
- 황룡사, 미륵사 목탑의 웅장한 모습(모형)에 감탄. 예전에 미륵사지석탑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주위에 이토록 대단한 성세가 있었으니라고는 생각 못함. 이런걸 복원할 수 있다면 대단한 상품이 될텐데, 기술이 없나?
- 조선시대 내정·문화·전투를 총 망라한 게임.
- 오면서 신기했던 것 - 중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보였다. 참 꼴불견이었던 것 - 한중일미 4개국어로 쓰여진 안내판을 보고 한 어머니가 아들보고 일본어로 읽어보라고 했던 것. 바로 앞 전시실에 한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받은 탄압에 대해 알려주고 있고 현재는 독립운동가의 의거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런 망동을 하다니! 화가 치밀었다. 아이가 히라가나 조금 읽고는 더 읽지 못하자 어머니 자신이 조금 읽다가 아이가 한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몇번이고 다짐을 받는다. 아버지로 보이는 이도 나서서 한자 공부 해야 한다고 말하고 허허 웃는다. 그러면서 운동가들의 자취는 휙휙 지나친다. 순간 나는 이 사람들이 이곳에 왜 왔으며, 무엇을 얻고 가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주변 사람들의 손에 한결같이 들려 있는 일제 카메라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의사들이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이러한 광경을 본다면, 또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게 될 것인가. 나는 국수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3세계 아이들이 받고 있는 과도한 노동과 인권 유린을 성토하는 자리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가겠는가? 반세계화를 외치는 자리에서 빅맥을 씹고 있겠는가? 독립기념관이 어떤 곳인가? 차라리 산책은 공원으로, 그따위 현장 교육을 하려거든 차라리 학교와 학원으로 돌아가라.

등등.

중앙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마지막 7전시관을 둘러보고 나니 시각이 정오에 다다랐다. 날이 훨씬 뜨거워졌는데도 사람들은 배로 불어났다. 마침 '겨레의 집'에서는 밴드가 공연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드럼을 두드리고, 기타를 치고, 마이크에서는 '헤이, 헤이, 헤이...'하는 시험용 음성이 흘러나온다. 격주마다 하는 문화 행사란다. 별로 관심이 가질 않아 그냥 나왔다. 너무 기대를 안 하고 갔던 탓인지 생각보다는 훨씬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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