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입은 프로그래머 고전,전통,온고지신

생활 한복을 입고 출근을 시작한지도 이주일이 지났다.

1. 이유
아마도 내가 프로그래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한복을 입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사실 한복을 입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제법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 딱 잘라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몇가지 떠오르는 것들로는 내가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흐름의 일부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 옛 사람에 대한 동경, 건강 문제가 있고, 좀더 설명이 필요한 이유로는 내 삶을 조금이라도 경쟁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이 있다. 의상은 경쟁이다. 내가 매일 출근하는 강남 거리에서, 처음 본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들에서 나는 느낀다. 경쟁에서 벗어나기는 경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우아하게 경쟁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복을 입고자 하게 되었다.

2. 구매 과정
그러나 내가 입을만한 한복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내가 입고자 하는 것은 정장처럼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활동성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 한복이었는데, 한복이란 것이 티셔츠처럼 몇천원대에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신중해야 했다. 우선 인터넷의 오픈마켓을 알아보니 생활 한복을 파는 매장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회/황의 단색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한복 전문 쇼핑몰들을 찾았다. 그러나 높은 가격대에 비해 일상에서 편하게 입을 만한 한복을 찾기가 힘들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조선후기의 한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활한복을 찾고 있었다는 점이고, 이 점에서 모양새, 품위, 활동성을 모두 만족하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또 한가지 난점은 여성 한복에 비해 남성 한복의 디자인이 대체로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뜻밖에 마음에 드는 한복은 오프라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에 출근하던 회사 근처에 질경이와 돌실나이라는 생활 한복 전문점 두 곳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모두 캐쥬얼 한복 브랜드로 꽤 유명한 곳이었다. 매장 주인의 말로는 질경이가 28년, 돌실나이가 15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물론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 수원점인데 돌실나이 매장은 비교적 넓다란 정장 가게 같아서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워, 질경이를 택했다. 그리고 그 날로 면맞깃온트임 저고리 두 벌과 검은 사폭바지, 조끼와 갓신, 면 외투를 하나 구입했다. 색상은 출근용 복장이므로 정장처럼 느껴지도록 모두 짙은 남색과 검정 등으로 골랐는데 볼 수록 세련된 멋이 있었다. 갓신은 280의 커다란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주문해야 했고 바지도 골반 아닌 윗배에 걸치는 특성상 비쩍 마른 허리에 맞추는 수술이 필요해서 우선 맡겨놓고 일주일 뒤쯤 찾으러 오기로 했다.

3. 출근
첫날엔 늘 입던 푸른 점퍼와 카고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조끼와 저고리만 안에 입었다. 특별히 한복보다는 남방에 조끼를 걸친 듯한 느낌의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는 이들이 한복이라고 알아보므로 신기하게 여겼다. 둘다 남방 형태로 단추가 달려 있으므로 일상 생활에 조금도 불편이 없었다. 얼마 뒤부터는 외투를 걸쳤는데 이는 누가 보아도 명백한 한복이나 아랫도리는 여전히 통큰 카고 바지이고, 아래는 또 갓신이므로 정거장에 서면 괴이쩍게 보는 시선들을 느끼곤 했다.

바지를 입는 일이 늦어진 것은 바지를 입었을 때 영 모양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한복에 본디 품이 있어 뭔가 풍선처럼 두툼한 바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양이 그냥 일자로 쭉 흘러내리다 보니 치마를 걸친 꼴이 되어 매우 보기 흉했다. 매장에 가서 두툼한 바지를 입고 나서야 그것이 처음 구입한 바지가 얇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친김에 두꺼운 바지를 하나 더 구입하고 인견으로 된 속바지도 구매하였는데, 매장 주인의 말로는 사시사철 입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속에 입어보니 허벅지에서 종아리에 이르는 공간이 두툼한게 비로소 입을 만 하게 느껴졌다.

-잠깐 예찬
본디 나는 통이 작은 바지를 못 입는다. 무릎이 남들보다 튀어나온 탓에 꽉 끼는 청바지 따위를 입으면 걸리므로 앉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커다란 카고바지를 입곤 하였는데 이것이 뒤에 나의 스타일의 중심이자 제약이 되었다. 겨울이 되면 커다란 다리통으로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몹시 추우므로 반드시 타이즈를 안에 입었는데 그것이 너무 몸에 달라 붙는 탓에 다리에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한복 사폭 바지는 통이 커서 불편이 없고, 인견 속바지를 입으면 늘 붕 떠 있는 덕에 앉을때 무릎 부분을 잡아 올려 편하게 한다던지 하는 과정도 일체 필요가 없다. 양반 다리 등 자세를 꼬고 접기에 깔깔한 카고바지들보다 훨씬 유연하고, 아래가 발목 두께 정도로 좁기 때문에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없는데다 바닥에 닿아 쓸리거나 신발에 깔려 찢어질 염려가 전혀 없고, 위로는 배까지 덮으므로 무척 따뜻하다. 의자에 앉을 때 엉덩이를 쭉 내밀고 바른 자세를 만들기에도 그만이다.

4. 반응
아무래도 굵직한 고객들을 상대하는 웹 에이전시이고, 고객과의 첫 미팅때 참여하기도 하는 개발자인지라 의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모습이 곧 회사의 첫인상이 될 것을 어찌하랴! 특별히 짙은 색의 정장 스타일 한복을 고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일찌감치 한복 입는 일을 상사에게 미리 알리고 허락을 받아 두었다.

대체로 반응은 회사 뿐 아니라 친구들이나 가게의 점원 등 만나는 사람들이 다 비슷하다. 1. 예술가 같다. 2. 스님 같다. 3. 시골 사람 같다. 4. 생김새에 잘 어울린다. 5. 직업 및 하는 일에 전혀 안 어울린다. 2,4는 특별히 내가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대체로 아직까지는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지만(특히 갓신과 목도리는 탐을 내는 사람이 많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한복 입고 다니는 사람을 '싸이코 같다'고 한 평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 타인으로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기도 했다. 애초에 남들 위해서 입는 옷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5. 일탈
위에서 열거한 것들 중 5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우선 사람들은 나의 직업을 예상하지 못한다. 대체로 한복 입고 다니는 사람은 전통문화와 관계된 일을 하거나 문인·작가·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대체로 웃기 시작한다. 다음으로 나의 상식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매일 아침 회사 근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베이글을 먹는 것은 기본이고-시간상 밥을 먹으며 책을 보고 공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두어 달 전부터 습관삼았다-,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면 바에 들러 좋아하는 흑맥주나 위스키를 들기도 한다. 점심 때는 점원들이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일식집에 가기도 하고, 맥도날드에 가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친구가 모는 오토바이 뒤에서 서울 시내를 질주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을 한복을 입고 하였으니 스스로도 매시간이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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