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생각

도올이었던가. 도서관을 거닐며, 거대한 공간에 오늘 시작해 평생토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만큼 가득한 책들을 보고는, 자기만은 절대로 쓰잘데 없는 내용으로 저 무더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었더랜다. 무슨 책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대목을 읽으면서는 무릎을 탁 쳤다. 나는 글을 쓰면서 늘 내 글의 용도에 대해 묻는 사람이었다. 대체로 내 글은 쓸모없다고 여겨졌는데, 다만 주변에서 보기 드물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어 때가 되면 꼭 다듬어서 내놓아야지 하고 꼭꼭 감추어두곤 했다. 마치 항아리에 글 조각을 모으던 연암처럼.

그러나 때는 오지 않는다. 내가 애써 구하지 않으면, 감옥에라도 기어들어가지 않으면 이토록 자유만방한 세상에서 지금의 나는 방에 앉아 글쓰기에 골몰하는 꼴을 원치 않는 것이다. 물론 자유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한창 역맛살 낀 나이때는 오히려 뜻 가는 대로 척척 글줄이 나가곤 했다. 지금 내 일상은 격무와 잡다한 사교행위로 점철되어 있는데, 후자의 이유가 큰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변화가 걱정이 되어 건강을 핑계로 한 달 휴직을 내었는데, 결과적으로 글 한줄 못쓰고 푹 요양만 한 꼴이 되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 놀림받을 만 하다.

최근의 생각은 일기를 한 번 써 보자는 것이다. 장차 크게 쓸모있는 내용을 적고자 하는 건 아니고 단지 그동안 밤새워 글을 읽어가며 배워둔 공부를 잊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이 합당한 것인지를 가려보는 것으로 배움을 되새기려 한다. 이것이 남에 대해서라면 비판이 될 것이고, 나에 대한 것이라면 자성이 될 테지. 그러나 예전에 같은 생각으로 일기를 쓰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의욕과 흥에 가득차 쓸모없는 내용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길게 채우고는 또 지워버리곤 했다. 간략하고 상세해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문득 떠오르는 두 개의 수필을 생각해 본다. 하나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고, 다른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개된 마지막 일기이다. 각각의 글을 살피건데, 전자는 상세하나 넘치지 않고 후자는 소략하나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이 비교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모든 글이 하나같이 일정한 道를 놓지 않으니, 이것이 나 같은 사람은 따르기 어려운 점이고, 글의 길고 짧고는 단지 변통에 불과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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