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초 여행 셋째날

셋째날

전날 첫 행선지로 생각해 둔 곳은 대관령의 삼양 목장이었다. 이곳에 가려면 일단 강릉 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있는 횡계행 버스를 타야 한다. 다시 횡계에서 삼양목장까지는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비는 12,000원 고정으로 되어 있다. 누구의 생각이나 정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값이 공히 정해져 있으면 오가는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기도 편리하고 바가지 걱정도 없어 좋다. 다만 편도 비용이라 혼자 이용하기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대개 동승 계획을 세운다.

나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버스 탑승 직전까지 기차여행 카페를 뒤적였었는데, 아쉽게도 대부분 상대를 이미 구했거나 일정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버스에 탄 사람들의 면면을 보니 대부분 여행객들로 별로 걱정할 것이 없어 보였다. 버스에 내린 직후 사람을 물색해서 세 명이 의기투합했다. 덕분에 한 사람에 4천원씩으로 무난히 택시를 이용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 사람은 부천, 다른 한 사람은 목포에서 왔다고 한다. 모두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택시 기사 아저씨가 혼자 여행하는 것의 장단점을 물었는데, 여정의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함, 식사의 어려움 등을 하나씩 얘기하다 보니 다들 공감하는 이야기라 금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도착해서도 우리는 마음껏 즐길 요량으로 각자 행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함께하면 비용이 크게 줄어드는 건 사실이므로 혹 시간이 맞으면 함께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삼양 목장

삼양 목장은 말 그대로 목장인데, 워낙에 규모가 커서 관광지로도 이름난 곳이다. 개방된 탐방로를 오르내리는 데 대략 네시간 가량이 소요되는데, 오르내리는 길이 같아서 대개는 올라가거나 내려올 때 목장에서 운영하는 셔틀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에 타고 있으면 목장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에 분량을 정확히 맞춘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이는 바깥의 상쾌한 풍경과 함께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 처럼 기분이 들뜨게 만들었다.

정상은 멋진 곳이었다. 이 때는 다행히 바람의 언덕에 방문했을 때완 달리 시야가 넓었다. 비록 먹구름이 드문드문 있어서 사진 촬영을 하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대신 햇빛을 가려 주어 돌아다니기는 매우 좋았다. 정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하나같이 그림 같다. 그간 거의 꺼내지 않았던 사진기를 꺼내어 찍는데 넓은 공간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파노라마 기능과 넓은 광각 렌즈가 아쉬웠지만 내 역량의 한계가 가장 클 것이다.

사방이 배추밭인 바람의 언덕과 달리 풀밭만 넓게 펼쳐져 있어, 똑같이 풍력발전기들이 있는 풍경임에도 퍽 다르게 느껴진다. 버스에서 내린 곳 옆에는 동해 전망대라는 곳이 있는데, 이 앞으론 큰 산이 없어 시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아쉽게도 바다까진 보이지 않았는데 만일 가을의 청명한 날씨에 와서 본다면 정말 멋질 것 같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보이는 것들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일단 방목으로 유명한 젖소들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팜플렛에 언급된 산양, 토끼, 거위 등도 보지 못했다. 후에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이렇게 왔다가 헛걸음한 사람들이 종종 있는 듯 싶은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 듯 하다. 동물들의 건강상 이유로 방목을 하지 않았거나, 우사 신축으로 인한 이동이 있었거나. 그리고 작년 초 전국을 휩쓴 구제역으로 모든 젖소가 살처분된 적도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의 목장 소식을 보면 작년 7월에 젖소 100여마리를 새로 들여왔다는 공지가 있다. 동물원 같은 체험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이라면 사전에 잘 알아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대신 가벼운 등산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제고 추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넓은 초원과 끝없이 펼쳐지는 산등성이가 눈을 즐겁게 한다. 군데군데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가 있는데, 그중 연애소설나무라고 불리는 ‘연애소설’ 영화 촬영지는 영화를 보지 않은 내 눈에도 꽤 근사하다. 하지만 탐방로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일부 구간은 회색 잔자갈을 뿌려둔 차도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여기로 셔틀 버스가 지날 때마다 연기가 뿌옇게 일어나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이 점은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다.

동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려오다 타조들이 있는 곳을 만났는데 타조는 처음 보는 것이라서 커다란 몸집이며 울음소리며 먹는 모습이며 심지어 기묘한 악취까지도 퍽 신기했다. 또 양떼 방목지를 세 번 만났는데, 한 번은 양들이 모두 탐방로가 아닌 차도 쪽으로 나가 있어서 멀리서 볼 수 밖에 없었다. 관광객들이 주의를 끌려 해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다행이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울타리 바로 옆에서 만져도 유순해서 신경쓰지 않고 먹기만 했다. 마침 옆에 관광객들을 위한 건초 더미가 있어 조금 주어 보았는데, 다 자란 양들은 받지 않고 울타리 안에서만 먹이를 찾는 반면 새끼들은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양들은 양몰이 쇼가 정기적으로 있다고 팻말이 쓰여진 곳이었는데 피곤한지 더위에도 불구하고 한가족처럼 한 덩어리로 달라붙어 잠만 잤다.

마지막으로 다 내려와서는 뒤쪽에 있는 작은 공원을 거닐었다. 탐방로 다리 아래로 계곡물이 흘러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은 아이들과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작은 폭포가 있는데, 너무 안쪽에 있어서 대체로 사람들이 보지 않고 가는 곳이다. 대단한 광경은 아니었으나 한적하고 물소리도 시원해 여기서 잠시 촬영을 하며 놀았다.

점심

이전에 택시를 함께 탔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보니 마침 다들 내려왔다고 해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횡계 시내에는 마땅히 먹을 음식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삼양 목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먹으려는데, 특이하게도 삼양에서 나온 컵라면들이 주된 메뉴다. 함께 먹을 수 있는 햇반과 단무지, 전자렌지에 데워 먹는 핫바와 라면 같은 것도 판매하는데 흡사 편의점 같다. 삼양에서 만든 목장이라는 점과 삼양의 대표 제품이 라면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나처럼 애써 멀리서 온 사람에게는 다소 김빠지는 메뉴다. 차라리 삼양의 봉지라면들을 봉지에 있는 사진 그대로 일품으로 끓여 주는 메뉴를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돌이켜 보면 나름대로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먹을 때는 정말 컵라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했다.

여행

횡계 터미널에 도착하니 다음 버스가 2시에 있었다. 강원에 도착하면 2시 30분이 되는데, 원래 오후 1시면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고 있을 거란 예상했으므로 보기좋게 빗나간 셈이었다. 아침에 너무 늦장을 부렸나 싶어 잠깐 후회를 하다가 다음엔 좀 더 정리된 원칙을 가지고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간 원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년의 여행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나기’라는 원칙이 하나 있었고, 스마트폰의 모든 알림을 제거하거나 폰 자체를 비행 모드로 두는 방식으로 이것을 충실히 수행했다. 또 ‘발도장 찍지 말기’라는 원칙이 있었는데 이는 마치 포스퀘어 등에서 체크인하며 점수를 쌓듯이 여행하며 더 많은 곳을 ‘효과적’으로 ‘찍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었고, 이는 시티투어 시간을 제외하면 그런대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대중교통을 타고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니며 현지인과의 접촉이 최소화된 이런 여행으론 어딘가에 가서 무언가를 보고 ‘느낀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원칙상에서의 궁극적인 실천은 무전여행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원칙은 일정에 관한 것인데, 하나는 올해에 생각한 것으로 전체 여행 일정을 절반만 잡자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7일 짜리 여행에 휴가 기간을 2배로 잡는 것과도 같다. 다니다가 좋은 곳이 있으면 몇일이고 머무르고, 작은 실수는 웃어버릴 수도 있는 일정상의 여유가 있지 않으면 쫓기듯 다니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번에도 휴가 첫 날에 망설이지 않고 즉각 출발했다면 이것도 어렵잖게 이뤄졌을텐데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이란 것은 종종 중요할 때가 있는데 이를테면 해가 저무는 것이나 방문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 12시 이전에 첫 일과와 점심을 마치면, 그후 행선지를 어딜 정하더라도 시간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을 안해도 되는 즐거움이 있다. (2곳 이상을 잡지 않는 이상에야) 또는 감정적인 이유로, 태백에서 정선 시내를 갔다가 다시 화암동굴을 갔던 것과 같이 지도상 절반 정도를 돌아가는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은 엄격하지 않더라도 경로는 꼼꼼하게 사전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추후에 여유가 되면 스마트폰에서 목적지들을 선택하면 최적의 경로를 알아서 찾아내 주는 앱을 만들어보고 싶다.

묵호 등대

다시 여행으로 돌아와서, 원래 행선지는 환선굴이었으나 강릉 터미널에서 가기엔 시간이 어중간한 것 같아 다음에 가기로 하고 묵호항으로 장소를 정했다. 강릉 터미널까지 함께 하셨던 분들은 한 분은 여행의 마지막날이라 서울 방면으로 향했고, 다른 한 분은 정동진을 보러 간다고 하셔서 각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제대로 된 담소를 나누지 못해서 적잖이 아쉬웠으나 각기 일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릉에서 묵호로 향하는 기차는 중간중간 바닷가를 바로 옆에 끼고 달리기 때문에 내륙 기차를 주로 이용해 혼 내게는 퍽 이채롭다. 정동진 역에서는 기차 안에서 바로 백사장이 보이기도 한다. 기차 안에는 물놀이 여행객들이 많은데 여기저기를 떠도는 여행자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붐비는 기차의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이어지는 풍경이 제법 멋졌는데도 불구하고 산길을 달리던 정선의 조용한 시내버스가 금새 그리워졌다.

묵호항에서 내려서 백사장으로 가는 길은 거리가 제법 된다. 예상대로 저물어가는 해가 점점 가속이 되는 시점이라 천천히 시내를 걸어 등대로 올랐다. 경사가 무척 급한 계단을 한창 올라야 하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렸는데 올라와서 보니 차를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다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게 재미있다. 높은 곳에서 보는 바닷가는 한없이 푸르고, 중간에 가옥들을 두고 있을 정도로 멀어도 바닷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난간에 카메라를 걸쳐서 바닷가 쪽으로 녹화를 시키고, 등대 뒤로 펼쳐진 석양을 보며 땀을 식히는 호사를 꽤 오랫동안 누렸다.

강릉 밤바다

돌아오는 길에 뭘 먹을까 생각하니 즐비한 횟집들이 눈에 띄었다. 다들 깨끗해 보였지만 혼자 먹기에 적당한 메뉴가 없는 듯 했다. 생각하다가 정동진에 가셨다는 분도 상황이 비슷할 듯 싶어 전화 연락을 드렸다. 전날 같았으면 그냥 시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겠지만 여행도 이제 막바지라 특별한 것을 한번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전화받은 여행자 분은 정동진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강릉 시내로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내가 같이 회를 먹자고 권하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엉뚱한 곳에서 바가지를 쓸 까봐 걱정되어 이래저래 알아본 바 안목항의 회센터가 괜찮다고 하여 그리로 갔다. 이곳은 1층에서 적절한 생선을 고르고 계산을 하면 2층에서 자리를 잡아 주고 회를 썰어서 준다. 생선과 멍게와 게살에 가볍게 소주를 곁들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회사를 다니다 타지로 훌쩍 떠나 온 비슷한 처지라 그런지 퍽 재밌다. 이런 재미로 사람들이 게스트 하우스를 찾나 보다. 뒤이어 매운탕을 먹는데, 생각 외로 고기에 살이 많아 무척 맛있게 먹었다. 식후에는 함께 인근 해수욕장을 거닐었는데 하얀 파도와 발을 적시는 시원한 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

밤바다를 보며 밤을 새다가 일출을 볼까 했으나 구름이 매우 많아 포기하고 푹 잠을 잤다. 여분의 옷을 다 쓰고 나니 뭔가를 제대로 끝마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아침에 성남으로 되돌아왔으니, 이것이 2012년 8월 10일 오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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