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초 여행 둘째날 개인

이틀째

다음 날이 되어 다행히 감기는 잡힌 것 같았으나, 나는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 앉아 있노라니 다들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데, 나는 태백으로 처음 올 때부터 인파가 넘쳐나는 그 방면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태백 만큼 서늘한 곳은 대관령 정도인데, 강릉을 경유해서 가야 하는 데다가 하루내 놀 꺼리, 그리고 하룻밤 묵을 곳이 없었다. 택시 기사분께 내 고민을 말하니 바다는 겨울이 좋다며 맞장구를 쳐 주시고는, 정선을 추천해 주신다. 나도 영월과 정선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울 것 같아서 망설였었는데, 영월은 덥지만 정선은 태백과 비슷하다고 하시니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태백에서 정선으로 가는 길은 일반 시내버스라,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버스가 한산하고 가는 동안 보이는 풍광이 퍽 아름다워서 지루하지 않았다. 가는 동안 이어폰을 꺼내어 페퍼톤스의 wish list 같은 노래들을 듣는데 특히 ‘단 하루의 평화’ 같은 구절을 들을 때는 기분이 한없이 유쾌했다. 이 좋은 곳을 놔두고 왜 며칠이나 집에서 허비했을까 하는 아쉬움. 중간에 여러 정거장을 들리는 동안 밀짚모자를 쓰고 관광안내서를 쥔 젊은이들이 탑승하곤 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친숙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내일로 티켓으로 기차여행을 하는 이른바 ‘내일러’들은 한 지역에 눌러 있을 생각으로 휴양을 온 사람들과는 어딘지 다른 행색을 하고 있는데, 나는 작년 여행부터 이들을 반복해서 마주쳐 왔던 것이다. 사실 티켓 특성상 7일의 제약을 안고 있는, 그래서 기차여행이란 전제 하에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찾아 헤메는 이들 덕에 나는 인터넷에서 여행에 필요한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처음 내일로 티켓을 알았을 때는 이미 제한 나이가 지나서 이용할 수 없었으니 부러울 수밖에. 한편으론 지금처럼 여행하는 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한편 가는 동안 대체로 내리막길이 계속되자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택시 기사 아저씨가 말해준 ‘시원한 정선’은 산간 지방에 한정되는 말인 듯 싶었기 때문이다. 전날 인터넷에서 확인한 정선의 낮 기온은 반도 서쪽의 다른 지방들과 비슷했다. 그도 그럴것이 정선 시가지는 낮은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도착하니 아니나다를까,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뜨거운 열기가 불어닥친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전날 용연 동굴의 서늘함을 떠올리곤 우선 화암동굴을 구경가기로 했다.

(첨언하자면, 태백 → 정선 → 화암동굴이 좋은 코스는 아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기껏 정선 시내까지 온 후 상당거리를 되돌아가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보다 좋은 여행 코스를 알아보고 떠나길 바란다.)

화암 동굴

화암 동굴이 위치한 곳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는 아늑한 곳이다. 본격적인 테마동굴 답게 동굴이 있는 산 아래에는 주차장과 여러 먹거리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굴은 들어간 이후 쭉 내려오는 구성이어서 입구가 산의 위편에 위치해 있는데, 오르는 길이 제법 경사가 있기 때문에 일전에 읽어 본 여행기들은 하나같이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기를 권했다. 하지만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날 모노레일이 ‘고장 수리중’ 이었다는 것이다. 차도처럼 생긴 정식 코스로 오르니 나무 그늘도 없어 땀을 비오듯 흘려야만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아래 가게들 왼편에 그늘이 있는 등산로가 있어서 그 쪽으로 오르면 보다 수월하다고 한다.

화암동굴은 원래 있던 광산의 갱도와 종유굴을 활용하여 몇 개의 테마공간을 조성한 관광지이다. 그중 첫번째인 ‘역사의 장’은 당시 광부들을 묘사한 여러 모형들과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듯한 음성 등 제법 신경 쓴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종종 광산 활동의 위험성을 묘사한 부분도 있었다. 간간히 실제 갱도를 입구에서 볼 수 있었는데 안이 까마득했다. 갈 길이 바쁘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보지 않고 지나쳤는데 군데군데 금맥을 돋보기로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부분에서 만큼은 어김없이 발걸음이 멈추곤 했다.

‘동화의 나라’는 동화 속 도깨비들을 귀엽게 의인화해서 금을 가공하는 여러 과정들을 모형화한 것인데 제작한 지 오래되어 상태가 썩 좋진 않았으나 아이들은 좋아하는 듯 했다. 금의 세계는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것들을 보여주는데 그중 금괴가 쌓여 있는 장소에는 수많은 동전과 입장권이 쌓여있어 관광지인지 휴지통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동전은 그렇다 쳐도 입장권을 여기에 투척하는 건 매우 악의적으로 보이는데, 이게 쌓이다 보니 사람들이 의식을 못하는 건 지도 모르겠다. 이 것들을 매일 치워버린다면 던지는 사람이 매우 적어지지 않을까?

마지막 테마는 천연 종류동굴인데, 생각 외로 규모가 무척 커서 놀랐다. 개방된 곳이 넓게 뚫려 있어서 그런지 용연 동굴에 뒤지지 않았고, 곡석·석주·석순 등이 매우 거대하게 자라 있어서 볼만했다. 여기도 용연 동굴처럼 특이한 동굴 생성물들에는 적당한 이름을 붙여 명패를 세워 두었는데, 이름과 잘 어울리는 것들이 있는 반면 뜬금없거나 한참 고민해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간혹 당혹스런 것도 있는데, 계단 옆 코너에 있는 ‘남근석’은 특히 이름이 너무 잘 어울렸다 (…).

나오는 길에 동굴 생물들을 나열한 도감 같은 둥그런 방이 있어서 구경하려는데 한 가족이 사진을 찍는답시고 공간을 다 점유하고 있어서 들어설 수가 없었다. 다른 가족들이 도감을 배경으로 하고, 가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입구를 틀어막고서는 대포같은 렌즈를 가지고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있으면 예의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겠지만, 기실 그들이 다른 관람객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좁은 통로나 박물관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까. 갑갑한 노릇이다.

점심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한시 반 정도였다. 정선 시내와 화암 동굴을 잇는 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아 다음 차량은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부근에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다행히 식사 때가 지나서 식당마다 한산했다. 입구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서는 곤드레밥이 눈에 띄어 주문했는데, 이렇게 주문할 때 마다 밥을 짓는 것인지 주문 받는 아주머니가 주방에 먼저 문의를 하고 주문을 받는다. 덕분에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간장에 비벼 먹는 따끈한 밥이 꽤나 맛있었고 강원도식의 소박한 반찬들도 흠잡을 데 없었다. 관광지 식당가에 있는 식당이므로 매우 불친절할거라 미리 지레짐작한 덕에 생각외로 친절한 것에 감사해하기도 했다.

한편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황당한 일을 당했다. 30분 이상 남은 시간이 무료해서 음료수 하나를 사서 의자에 걸터앉는데, 세 모금째를 마시려고 캔을 입가에 대는 순간 입술이 왕바늘에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 황급히 입술을 떼고 보니 벌레 한마리가 윙 날아간다. 퍼뜩 동굴 입구 휴게실에서 누군가 쏟아놓은 음료수에 말벌들이 모여들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 경우 말벌은 아니었지만, 음료수 냄새를 맡고 온 조그마한 벌이 캔과 입술 사이에 끼는 바람에 그 꽁지에 내 입술이 찔린 것이다. 구멍난 그 부위가 심하게 욱신거려서 화장실에 가서 부위를 씻어내고 있는 힘껏 빨아보기도 했다. 다행히 벌침 같은 건 만쳐지지 않았고 다른 신체 반응도 없는 것으로 보아 쏘이진 않은 듯 싶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자 점점 부어올라서 앞니에 느껴지는 입술의 느낌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입술이 퉁퉁 부은 채로 돌아다녀야 하는지, 그 꼴이 얼마나 이상할지, 큰 탈이 생기는 건 아닌지,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만일 붓기가 빠지지 않았더라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당장 병원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수십 분이 더 지나자 붓기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통증도 줄어들어서, 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는 점점 더 좋아졌다. 다만 욱신거리기는 그날 저녁 잠들 때 까지 미미하게 계속되어 녀석의 독이 얼마나 지독한 지 새삼 깨닫게 했다.

아라리촌, 더위

다음엔 시내에 있는 아라리촌을 갔다.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유명한 곳이고 무엇보다 버스의 경유지이다 보니 말 그대로 ‘발도장’ 한번 찍겠다고 갔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유명해 진 이유는 1박 2일 때문이라는데 사실 대부분 숙박지라 안에 들어가서 볼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그나마 동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정자와 산책로가 있어서 좋았으나, 문제는 예상대로 너무 더웠다. 다 보고 나와서 시내로 향하는데 조금 걸었는데도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무엇보다 여행 올 때 모자를 챙기지 못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원래는 이후 아우라지를 보고 스카이워크와 짚와이어를 한번씩 체험해 볼 생각이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짚와이어를 타는 것도 내키지 않아 그냥 터미널로 돌아왔다.

어찌나 더운지, 처음엔 이도 저도 다 포기하고 남은 휴가를 시원한 태백에서 푹 쉬면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날 때 전날과 달리 마치 가을 하늘 같았던 청명한 날씨를 생각하니 돌아가면 바람의 언덕에 다시 올라 제대로 감상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동안 밀짚보자를 쓰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마냥 푹 쉬고 싶은 욕구와 처음 가 보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강릉으로 표를 바꾸었다. 강릉을 경유해 주변의 다른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서다. 떠나면서 정선에는 다음에 와서 영월과 함께 제대로 여행을 해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강릉에서

강릉은 이전에 와 본적이 있는 곳이다. 터미널에서 대충 저녁을 먹고, 밤바다를 볼까 싶었지만 버스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니 내키지 않아 곧장 PC방으로 향했다. 늘 하던 것처럼 다음 날의 여행지 정보와 날씨 정보를 얻고, 그 동안 스마트폰들과 보조 배터리를 충전시켜놓는다. 아직 갈아입을 옷이 남아 모텔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으므로, 잠은 강릉역 인근의 보석 사우나에서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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