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회사로 향하는 길에는 하천이 하나있다. 출퇴근시 늘 지나치는 그 하천에는 청둥오리 세 마리가 사는데, 그 자태가 아름다워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밀려들 하루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 잠시나마 가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나는 늘 그냥 보기만 했고 그들은 멀찌감치 물장구를 치거나 종종걸음으로 다니며 서로 관여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종종 누군가 새우깡 따위를 던지며 희롱하는 모습을 보면 오리들은 좋다고 달려드는데도 공연히 화가 나곤 하였다.
어느날 밤, 산책차 저수지로 향하던 길에 그곳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기척이 느껴져 둘러보니 바로 그 오리들이 눈에 띄었다. 하류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놈들이 밤에는 어디로 사라지나 늘 궁금해 하였는데, 뜻밖에 상류의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뭐라 할 새도 없이 오리와 나는 서로 놀라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대단히 겁을 먹었겠지. 내가 한 발짝을 내딛으려 먼저 기척을 내자, 그제야 멍하니 보고 있던 오리들은 고개를 돌려 서둘러 강물을 향해 뒤뚱거렸다. 그들이 지금껏 이 풀숲에서 편하게 수면을 취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얼른 그 자리를 피하였다.
느닷없이 공자와 노자 사상의 차이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흔히들 말하기를 공자는 보수적이고 노자는 자유롭다고 한다. 공자가 인간의 질서를 강조하고 노자는 흐르는 물에 곧장 비유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정적이며 요즘 세상과는 안 맞는 인간처럼 보이는 반면 노자는 유유자적하며 동적인 요즘 세상에 잘 맞는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공자가 정이고 노자는 동인가?
공자는 금수와 더불어 살 수 없다고 하고, 나아가 각기 처한 자리에 따른 처세를 강조한다. 노자는 고을과 고을 사이에 오가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해야한다고 말을 하지만 노자는 하지 않음의 미덕을 말하며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처세 방법이 유위라면 노자는 무위다. 노자의 사상에서 세상과의 대화란 단절되어 있는 반면에, 공자는 세상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때에도 물러나 학문이라도 닦으며 끊임없이 현실 참여를 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공자와 노자의 차이이다. 말하자면, 망망대해를 마주하여 공자의 학문은 그 위에 배를 띄우는 것인 반면, 노자는 바닷가를 거닐며 바닷물과 서로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상관하지 않으면서 안위만 보존하는 것이 어찌 동인가? 고꾸라질 걱정을 무릎쓰고 파도를 타듯 헤쳐나가는 것이 어찌 정인가? 바다위에 위태롭게 있으므로 어찌 은자처럼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말처럼 힘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즐기는 사람'이 되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하여져서 '마음 가는대로 하여도' 바닷물에 처박힘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면 그 어찌 자유가 아니겠는가?
유학자의 저서 가운데, 혹자는 공자는 안에서 구했고 노자는 밖에서 구하였으니 공자가 뛰어남이 있다 평하였다. 오리와 상관없는 사람으로만 지내다가 처음으로 유의미한 충돌을 겪고 난 뒤 얻는 깨달음이 비로소 나로 하여금 이 말을 깨우치게 하였다.

덧. 여기서 말하는 노자는 문자 그대로 노자이지 노장(노자 + 장자)가 아니다. 노장의 차이점에 대하여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호숫가에 이르러 비로소 물결이 바람에 스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려움 광땅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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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08-12-30 10: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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