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은 다산을 말로만 존숭할 뿐 그가 무엇을 썼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니, 마치 저 오래된 인도의 수학자를 대하는 듯 하다. 그를 사상가라 지칭하면서 무슨 사상을 폈는지는 알지 못하며, 실학자라 하지만 무슨 시책을 폈는지도 알지 못하여, 당장 한자 교육 한 가지를 보더라도 그가 두 권 책으로 한자 교육의 방식을 일신한지가 거의 이백 년인데, 오늘날 누가 ‘아학편’을 가지고 공부를 하려 하는가? 천자문은 여전히 서점에 즐비한데, 다산의 책은 간간히 논문이나 잡문에 언급이나 될 뿐 한번 번역조차 된 적이 없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학편

배병삼은 그의 천자문에 대한 한겨레 컬럼(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30576.html) 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출판시장(?)은 이 책을 외면하고 만다. 그의 훌륭한 아동 교육철학에도 불구하고 <아학편>이 <천자문>의 적수가 되지 못한 까닭은 무엇보다 ‘내용이 재미없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즉 글자를 짜 맞추기에 신경을 쓰다 보니, 감칠맛 나는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원조 <천자문>은 좀 어려울지는 모르지만, 구성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짜여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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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08-12-30 10: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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